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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전쟁영화 감상究

by 하승범 위드아띠 2007. 3. 8.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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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나남출판

“진주만 이래 최악의 패배”(뉴스위크)로 불렸고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남북전쟁 때의 불런전투 이후 미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라고 자인했던 6·25전쟁 때의 흥남철수에 관한 당시 참전군인의 보고서다.


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 두 달간 미 해병 1사단이 개마고원에 들어섰다가 중공군 제9병단에 포위돼 전멸위기를 맞았다가 극적으로 탈출, 흥남을 통해 철수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복원했다
.

단순한 전사(戰史)가 아니라 주요 지휘관에서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전투현장의 생생한 현장감까지 그대로 전달한다.

저자는 흥남철수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중공군 13병단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미 육군과 한국군 중심의 서부전선과 달리 보름에 걸친 ‘공격적’ 후퇴작전을 펼친 해병1사단이 있었기에 중공군 9병단은 치명타를 입어 결국 반격의 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때의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 작전은 6·25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일지 모른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서쪽은 아래로 내려오고 동쪽은 그 위로 올라간 모양새가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 조선일보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압록강 및 장진호에서 벌어진 중공군 12만명과 유엔군 2만명 (미해병대 1사단 1만7천명·유엔군 3천명)의 비극적인 전투를 말한다. 이 단 며칠간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전쟁"에서 중공군은 4 만여명이 죽고 미해병대와 유엔군 2천5백여명이 전사했다.

세계적으로 그 용맹성을 자랑하는 미해병대이기에 그 상처는 엄청나게 컸다. 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벌어진 그 비극적인 장진호전투는 목격한 한국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역사속으로 묻혀지고 만 것이다. 
 
이들이 바로 흥남부두(그해 12월24일)로 철수한 미해병대들이며 "십만명의 한국피난민"을 군함에 함께 싣고 남하한 "인간승리"의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그 장진호전투 생존자들은 "초신휴"라고 부르며 그 부대는 미국대통령부대로 표창받았다. 그 생존자들(미국·영국·호주군)이 만든 모임이 "초신휴(The Chosin Few-장진호 생존자 협회)"이고, 그 인원이 현재 7천여명에 이른다.
 
함경남도 장진군에는 장진강(長津)을 막아서 만든 장진호라는 인공호수가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된 1950년 11월24일,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해병대 1사단이 장진호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국의 인민지원군 9병단이 몰래 장진호 일대에 들어와 있었다.  중국 9병단은 미해병대 1사단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당시 장진호 일대는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뒤늦게 사지(死地)에 들어왔음을 안 미해병대 1사단은 방향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사적으로 포위 추적하는 중공군과 매서운 추위, 그리고 엄혹한 굶주림 속에서 상당수 대원을 잃고 간신히 흥남으로 빠져 나왔다.

이날 이후 장진호 전투는 미해병대에서 가장 무서운 전투로 회자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대한 수기(手記)가 쏟아지고,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 모임인 초신 퓨(Chosin Few)라는 단체까지 생겨났다. 장진(長津)을 일본어로 읽으면 초신(ちょうしん)이 된다. 한국전쟁 때 한국에는 변변한 지도조차 없었다. 당시의 지도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만든 것뿐이었다. 미군은 일본인이 만든 지도를 구해, 일어를 영어로 바꿔 적은 후 사용했다. 그래서 미군은 장진을 초신으로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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