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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화 감상究/전쟁역사 그리고...

'자유의 다리'과 '돌아오지 않는 다리'

by 하승범 200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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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다리'와 '임진강 철교'

자유의 다리 ; 1953년 한국전쟁 '전쟁포로교환'을 위해 임시가설되었던 나무다리로 당시 12,773명의 국군포로들은 경의선 철교까지 철도로 이동하여 도보로 이 '자유의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지난 연휴 아이들과 임진각을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옛 임진강철교의 모습이 아직도 그 당시의 상흔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도 분단되어 으르렁거리는 아픈 조국의 모습이 안타깝다.  최근 더욱 경색되는 남북관계도 그렇고, 60년전 처럼 타도북한을 외치는 우익전쟁광(?)들의 무뇌사고가 걱정스럽고, 역사의식도 철학도 국제관계도 없는 듯한 현 정부도 답답해 보인다. <2008년 10월 3일>

임진각의 '자유의 다리'와 더불어 한국전쟁 정전협정 직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의 군사분계선에 위치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남북이 많은 전쟁포로를 교환한 곳으로 포로들이 이 다리 위에서 일단 방향을 선택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전협정에 따라 중공군과 북한인민군 포로 75,823명이 북으로, 유엔군과 한국군 포로 12,773명이 남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북한인민군 포로 7,604명, 중공군 포로14,235명이 남한과 대만을 희망하였고, 한국군 포로 325명, 미군 포로 21명, 영국군 포로 1명이 북한을 희망하였다.

포로들 가운데서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명준'처럼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북한인민군 포로 86명, 한국군 포로 2명이 제3국행을 원하여 1954년 2월 21일 인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이들 중 15명은 그대로 인도에 남고 1956년 55명은 브라질로 9명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이들 88명 중 12명을 중공군 포로로 중국도 대만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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