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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영화話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관련된 영화

by 하승범 2009. 6. 28.

히로시마 원폭투하 (Hiroshima atomic bombing) ;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 미 공군 393 폭격대(509th Composite Group, 393d Bomb Squadron (393 BS)) 소속의 미군 B-29 4발 중폭격기(에놀라 게이(Enola Gay))에 의해 히로시마(Hiroshma, 広島県)에 최초의 원자폭탄(Code Name ; Little Boy, 우라늄235)이 투하된다.  당시 인구 약 34만명이었던 히로시마 인구 중에서 1945년 12월말까지 약 14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의 핵 시대는 1938년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Otto Hahn)이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부딪치면 분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1939년 10월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원자폭탄의 개발을 결정한다. 


일본도 1940년 4월부터 원자폭탄 개발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육군항공기술연구소 야스다 다케오 중장은 스즈키 신사부로 중령에게 원폭 개발가능성을 검토하도로 지시한다.  그해 10월 원자폭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가 제출된다.  

1941년 4월 육군항공기술연구소는 정식으로 이화학연구소 오코치 마사토시 소장에게 정식으로 원자폭탄 제조연구를 의뢰한다.  이들은 1943년 초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고 이 보고서에 입각하여 도조 히데키는 육군항공본부에게 원자폭탄 제조를 지시한다. <출처 ; 우리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이창위 | 궁리 | 2005년>  


일본은 종전까지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미국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관련된 영화 ;

멸망의 창조 (Fat Man And Little Boy) 1989년 미국
히로시마 원폭투하 (Hiroshima: Out Of The Ashes) 1990년 미국 

역사학자 다카키(Ronald Takaki)는 "유럽에서의 전쟁과 달리, 태평양에서 벌어진 무력충돌은 상호간의 증오와 고정된 인식이 큰 영향을 미친 인종전쟁(Race War)이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인식과 적대감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고 주장한다. <출처 ; 배틀, 전쟁의 문화사,  존 린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그러나 일본사회의 미군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군의 본토방어계획을 고려한다면 미군의 전투손실이 50만명 이상이 될 것이라는 판단은 논리적이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일본군 사령부를 비롯한 42,000명의 병력과 군수공장이 주둔한 군사도시였다.  따라서 미군은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히로시마를 폭격함으로써 일본의 정책을 변화시키려기 위한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영국 장군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877~1976)는 그의 저서 '전쟁의 역사 (A History of Warfare)'에서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에 대해 불필요한 일로 옳바르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미 일본은 전쟁에서 충분히 패배하고 있었고 미군의 재래식 폭격 만으로도 철저하게 일본을 파괴하여 항복을 유도할 수 있었다는 입장이다.

이는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가 태평양 전역에서 전쟁을 수행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닐까!  당시 일본제국군의 야만성과 비문명성,  제국주의 일본사회의 광기와 정신주의을 이해하고 경험했다면 그는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지 않을까!
 
만약 원자폭탄 개발이 늦어져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일본 군민이 전투를 벌였다면 지금의 일본이 있었을까.  어쩌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이 지금의 일본을 살린 것은 아닐까.  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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