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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영화話

해방 전후 우리 역사 속에서 애잔한 단어, 파르티잔

by 하승범 201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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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 (North Korean Partisan In South Korea, 1990년 한국)


한국전쟁 당시 통신사 종군기자로 근무하다 1950년 9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이태'의 자전적 수기 '남부군 (1988년, 두레刊)'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감독 : 정지영 

출연 : 안성기, 최진실, 최민수, 강태기, 이혜영, 독고영재, 조형기, 트위스트김, 신윤정, 임창정


해방 전후 우리 역사 속에서 남아있는 애잔한 단어, 파르티잔


파르티잔(Partisan), 흔히 '빨치산'이라고 일컫는 이 말은 처음 접했던 80년대나 지금이나 우리 역사 속에서 애처롭고 애틋하다. 해방 직후 친일지주계층, 친일경찰, 친일사회지도층 등에 대한 제대로 된 해결이 없는 현실 속에 저항했던 민초들의 절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절망적인 현실을 타개하고자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쉽게 전도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남한은 물론 북한으로부터도 버려진 존재로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민족지도자들 조차 일본제국주의에 전향하고 민중들은 자포자기하였다. 아직도 깨어있던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도구나 이념으로써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인 제국주의 사회구성체를 형성하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이념적인 도구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중국과 소련공산당의 항일전쟁에 대한 직접 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만이 긴 일제강점기에서 신념을 지킬 수 있는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순수한 열정으로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했던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북으로는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남으로는 미군정과 이승만 친일주의자들에게 이념전쟁에서 밀려나면서 고립된다. 결국 남한에서의 극단적인 무력투쟁은 그들을 더욱 힘든 역사의 이방인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의반 타의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빨치산'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상황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 그리고 조금 다르지만 이문열의 '영웅시대' 등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과연 무엇이었는가.


해방 공간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은 반민족 친일주의자들을 척결하고 민족주의 계열과 연합하여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편의주의적 발상과 이승만의 정권음모 등과 맞물려 친일세력에 대한 척결이 어려움에 처한다. 오히려 친일세력은 이승만과 미군정을 등에 업고 과거 일제강점기와 같은 권세를 유지한다. 더구나 그들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자'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탄압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북한에서 벌어진 친일세력에 대한 척결과 자본가, 지주에 대한 탄압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다.


제주 4.3사건은 남한 사회주의세력의 무장투쟁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제주에 파병되던 군인들이 반란을 이르킨 '여순사건'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무장세력화를 가속화하였다. 물론 '여순사건'은 반공세력의 규합과 이승만정권의 공고함을 갖게하는 계기도 되었다. 결국 이는 사회주의세력에 있어서는 전략적인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빨치산'의 구성을 보면 지도층은 대부분 소위 지식인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빈농 등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무산계급 출신이었다. 남한 내에서 좌익에 몸담았다 전향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사건 처럼 잘 알지 못하지만 가족이나 친구가 좌익이어서 여러 이유로 잠시 그런 분위기에 호응했던 많은 민초들이 생존을 위해 빨치산에 들어간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국군토벌대에 생포된 대부분의 빨치산은 재판을 받고 일정 기간 복역하고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납치되거나 오도되어 가담한 선량한 양민 이나 범죄자'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북한은 물론 남한도 그들 '빨치산'을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내는 사뭇 달랐다. 북한은 남노당계열이 주축인 '빨치산'이 북으로 돌아올 경우 발생할 지 모를 권력투쟁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남한은 이들을 정규군으로 인정할 경우 더 많은 빨치산이 증가할 것을 우려했다. 이렇게 남한의 '빨치산'은 남북에서 버려져 소멸해 갔다. 

"기록에 의하면 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 지리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회수 10,717회, 전몰군경수 6,333명, 빨치산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만한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추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 하나 쯤은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태 '남부군' 에서>


우리는 조국에게 있어 무엇인가.


이 영화는 조선중앙통신사 종군기자 출신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였던 이태 (1922년~1997년, 이우태)의 자전적 수기 '남부군 (1988년, 두레刊)'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빨치산 등에 대한 좌익에 대한 시각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1987년 출간된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는 이태의 수기내용이 일부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태는 '남부군' 서문에서 이 부분에 대해 '표절'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보인다>


저자 이태는 1952년 3월 토벌군에 생포되어 처벌후 사상전향을 하고 이후 정치를 하였다. 주로 야당에서 활동하며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민주산악회 등에서 주요 보직을 역임하고 제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저자 이태의 북한과 빨치산에 대한 인식이 흥미롭다. 우선 북한 정권에 대해서 이념적 동지애는 물론 휴머니즘도 없다며 날선 비판을 한다. 또한 영웅적이고 지사적인 남한출신 빨치산과 달리 북한출신 빨치산은 사상성도 낮고 투쟁성도 형편없는 비겁자로 묘사한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빨치산'을 제2전선이라고 하며 남로당계 게릴라들이 남한에서 테러 및 약탈을 자행했던 것으로 북한 정권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 역사에서 빨치산에 대한 연구가 38도선 이북에 집중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 역사 속의 '빨치산'이란 단어는 애잔하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 가장 잘 싸운 것은 노동자, 농민입니다. 온 세계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전진입니다. 오늘의 민족통일 문제는 몇 사람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애국자인 척 가면을 쓰고 통일을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통일은 튼튼한 밑으로부터의 통일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 경제의 민주주의를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이현상평전, 1945년 11월> 이것이 우리 역사 속 빨치산의 신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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